눈을 감으면 - 황경신

2013. 12. 10. 01:06- Book & culture



몇일전 M이 책 한권을 추천했다.

책을 보다가 그림도 있고 좋은 글들도 많아 좋아할것 같아 샀다고. 

책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행복했고 

또 책 내용이 마음에 너무 와닿게 M에게 고마웠다.




눈을 감으면 - 황경신


그림이 숨겨두고 황경신이 찾아낸 이야기들.


 무언가를 들으려 하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다.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 말할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눈을 감으면, 보고 싶으나 볼 수 없는 무엇, 사람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희망 같은 것들이 보인다. 눈을 감는다는 행위는 소극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것이다. 고요하고 흐릿한 세계 안에 잠겨 온몸과 마음으로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을 보고 느끼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면의 노래는 언제나 사람과 사랑과 희망이 부재하는 시간에 찾아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이별에서 시작된다. 그림 앞에서 눈을 감고, 나는 그들이 숨겨둔 이야기를 들었ㄷ. 이별은 슬픔에 이르렀고 슬픔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성장에 이르렀다.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이 사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흐릿한 세계가 무한의 색채로 가득 차고,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그러나 먼 우주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려는 아름다운 작정이 내게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라의 히망이, 그 안에 있다. 눈을 감으면 - < 작가의 말 > 중에서. 






책 표지를 한장 넘기면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이라는 그림 삽화와 함께 황경신의 글이 시작된다.

본래의 이 그림은 한 여자가 지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공 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한줄밖에 남지않은 수금을 잡고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며 눈은 천에 의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여기서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류를 나타내고 수금의 끊어진 현은 인간의 절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 줄 남은 그 현은 인간의 희망을 의미한다고.

그리하여 이 그림의 메시지는 

"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남은 희망이 있다면 끝까지 살아가야만 한다" 라는 것.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자신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 그림이라고 했다,

황경신 작가의 글에서 희망은 슬픔이었다. 글을 읽으면서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저렇게도 슬플수 있구나 하는걸 다시금 깨달을정도로.

책에서처럼 희망의 뿌리는 슬픔이며 슬픔에서 벗어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녀는 심심하다. 어린소녀는 무료하다. 어린 소녀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지만 아직 어려서 할 수가 없다. 꽃솔이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햇살. 퉁퉁 쳐서 떨어뜨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어린 소녀는 어른이 되고 싶다. 꽃처럼 자라 꽃처럼 예쁜 사람이 되어 꽃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p143

어린 소녀에게는 백 년 같은 시간이 흐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른이 된다. 몇 번인가 한 송이 꽃 같은 사랑을 심장에 심어보지만 어쩐지 잘 자라지 않았다. 어떤 것은 뿌리가 약하고 어떤 것은 줄기가 갈라진다. 어쩌다 조심스럽게 봉오리를 맺은 것도 미처 다 열지 못한 채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한때 어린 소녀였던, 이제는 여인이 된 그녀의 심장은 조금씩 말라간다. 꽃 같은 사랑의 씨앗들이 우연히 그녀의 심장에 둥지를 틀어도, 그녀는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피었다 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씨앗으로 묻히는 것이 덜 아프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

어린 소녀 하나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만난다.

"무얼 하고 있니?"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불쑥 묻는다. 어린 소녀에게 혹은 먼 과거 속의 자신에게.

"시간을 털어내고 있어요."

"무엇때문에?"

"얼른 자라서 뭔가가 되려고요."

갑자기 그녀는 깨닫는다. 굳이 꽃이 되려 할 일은 아니었음을. 줄기나 뿌리, 또는 뿌리 근처를 맴도는 벌레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었음을. 백 년이라는 시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그 시간 속에 그녀를 가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그런데 뭐가 되면 좋을까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어린 소녀가 묻는다. 그녀는 텅 빈 두손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한다.


" 무엇이든 되렴 "

-p146-147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눈을 감으면 알 수 있을까. 눈에 보인다고 귀에 들린다고 전부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절망이 있고 슬픔이 있다면 진정 언젠가 희망이 찾아오는 걸까. 

멍해진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

어쩌면 이렇게 책들을 잘쓰는지, 어쩌면 이렇게 공감이 가는지, 어쩌면 이렇게 나같은지.

나도 언젠간 저렇게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