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영하는사람 - 추자방크

2015. 11. 15. 15:53- Book & culture



어른이 되면, 저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슬픔에 익사하지 않는 법도 배울 수 있을까?



 카타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아버지가 자그마한 상자 속에 넣어둔 사진 속의 엄마가 다다. 식탁 위에 늘어놓고 몇 번이고 뒤적거리던, 아니 영원히 그럴 것만 같던 사진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여름이면 마당에서 머리를 말리던 엄마. 그런 엄마를 나무라던 아버지. 엄마는 한 번도 아버지 말을 어기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아버지를 떠났다. 작별 인사도 없이, 새벽녘 일을 하러 안개 속을 뚫고 가던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는 말이 없다. 아버지에게선 늘 담배 냄새가 났다. 아버지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나중에 그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던 다른 모든 남자들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그 냄새. 아버진 방이 아닌 부엌에서, 우리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을 잔다. 엄마가 없는 지금 카타네 가족 모두가 그렇다.

 카타의 고향 마을 바트에서는 아무도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아버지 혼자뿐이었다.
집을 떠나서도 아버지는 늘 혼자 수영을 한다. 카타는 늘 그 모습을 몰래 바라본다. 아버지의 말없는 등을 타고내리는 물방울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길 위 어딘가에서, 자신과 동생 이스티를 버려둔 채, 아니 둘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렇게 가버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엄마와 똑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그리고 눈처럼 하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렸다. 사람들은 엄마가 떠난 후 외할머니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고 말한다. 엄마가 떠나던 날, 카타는 비가 내리는 외할머니 집 마당 나무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치 왕고모는 부다페스트에 산다. 이웃의 에르치 아줌마는 왕고모가 노상 투덜대는데도 웃는 얼굴로 잡지를 들고 놀러 온다. 만치 왕고모는 카타와 이스티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카타와 이스티와 아버지는 소피 고모네로 갔다. 세 사람을 태워준 건 손톱에 매니큐어를 예쁘게 바른 에바 아줌마였다. 자동차를 타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을 본 것도. 에바 아줌마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카르치 아저씨와 결혼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바 아줌마는 예뻤고, 아버지는 담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에바 아줌마의 드레스 밑단이 왜 뜯겼는지 카타는 안다. 카타는 카르치 아저씨에게 아줌마를 혼자 차지할 수 있게 우리 엄마를 데려다 달라고 할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아니 모르겠다. 세상은 카타가 모르는 것투성이다. 

 왜 또 소피 고모네를 떠나야 하는지. 근처 마을까지 통틀어 가장 잘생겼던 졸탄 아저씨의 한쪽 머리가 왜 무너져 내린 건지, 잡지 속 여자처럼 예쁜 비락 언니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건지, 아버지를 따라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동생 이스티가 왜 이렇게 걱정되는 건지…… 그리고 엄마는 왜 돌아오지 않는 건지.




“이 소설을 읽은 당신이 눈물을 왈칵 쏟는다 해도 난 아무 말 않을 것이다.”      _피터 나다스(카프카 상 수상 작가, 베를린 예술원 회원)


 예전에 읽었던 비행운 같은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슬픔이 가득한 책이다. 반전에 반전을 기하는 책도 아니고, 인물들간의 거대한 갈등도 없으나 그것 그대로 슬픔의 여운이 전해져온다. 엄마는 어째서 말 없이 떠났는지 이유는 모르나 그 일로 인해 카타에게 시간은 견딜 만한 것들과 견딜 수 없는 것들로 나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이스타와 함께 이 마을 저마을을 전전하면서, 각자 나름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그들이 그 아픔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어떻게 슬픔을 표현하는지 알아가며, 어른들도 슬픔을 배운다는 것도 알게 된다. 본인의 아버지의 아픔까지도. 

 펼치자마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어버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엄마를 잃어버리는 꿈을 꿨다. 아니, 엄마가 사라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책 속의 엄마처럼, 내 엄마도 어디간다는 말도 없이 가방만 들고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찻길도 쫓아가고 온 동네를 휘저으며 엄마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카타처럼 하지 못했다.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힘들고 버려진 기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함, 기댈수 없는 허전함, 모든 슬픔이 나를 엄습했다. 책 속의 각각의 인물들은 수영을 하기도 하고, 말을 하지 않은 채 일상생활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나름의 방법을 찾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할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다 인정하고 지쳐가는 것이었다.

 비락처럼 관심있어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릴 때에도 소리를 치지도, 매달리지도, 멍하니 있기도, 그 자리를 뜨기도, 비락처럼 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떠날 때에도 카타와 이스타처럼 하지 못했고, 아버지처럼 계속 일을 하고, 수영을 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꿈 속의 나는 그렇게 고수하던 긴머리에서 앞머리를 스스로 잘라버렸다. 삐뚤삐뚤했지만 꿈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거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보며 겨우 웃어 보였다.



꿈에서 깬 후에 책에 대한 여운이 더 짙게 배어 나온다. 책 한권이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았구나. 슬픔을 이렇게도 표현하는구나..